주요사업
주요사업

네트워크 관련 자료

자료실

2013 독서문화캠프 하얼빈

관리자 2020.07.17 17:29 조회 수 : 3

2013 동북 3성 조선족학교 꿈을 키우는 독서문화캠프는 하얼빈에서 열린다.    
올해는 하얼빈이라는 장소에 특성을 살려 <안중근의사>에 대한 주제로 진행되어진다.  
  
안중근 의사는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또한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할 당시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일화도 있을 만큼 독서와 교육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고 이를 증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중근기념관을 방문하고 아이들이 직접 소감문을 써보고, 소감문을 통해 노래도 만들고 연극도 만들 예정이다.  

  

 

안중근 安重根

 
   

   

   

* 출생 ~ 사망 :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 출생지 :황해도 해주

* 요약 :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사형되었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1세 (1879년) :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다.

6, 7세 (1885년) :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 (1894년) :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김아려와 결혼하였다.

17세 (1895년) :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26세 (1904년) :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28세 (1906년) :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29세 (1907년) :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30세 (1908년) :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31세 (1909년) :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러시아 검찰관에게 자신을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라고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郎)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32세 (1910년) :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공판이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