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8.28>슬라바가 잘살던 우즈베키스탄에서 동쪽으로 온 사연

by 관리자 posted Nov 02, 201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함께 일을 하며 친해진 송슬라바의 이야기.
슬라바는 함께 일을 하는 고려인이며, 나보다 두살 위이다.
소련 시절 군대는 잠수함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각종 기계에 대해서도 익숙하다.
사진에서 보는 것 처럼 나의 머리도 깎아 주었다.

새로운 마을의 빈집을 찾아 다니고, 고려인 들과의 상담에서 통역도 맡고, 빈집을 수리하기 위한 각종 건축자재도 사러 다니고, 고치는 일도 지휘하고..... 하다못해 식당의 부식도 사러 다니는 등 하루가 바쁘게 지내고 있다. 
모든 게 바쁜 한국사람과 함께 하는 덕분에 덩달아 바쁘게 지내며, 일요일도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다니다 보면 끼니도 걸르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 아! 낚시 가고 싶다. 3일만 아무 생각 안하고 낚시만 하고 싶다' 라며 특유의 낙천성을 보이기도 한다.

부인과 28살의 아들과 25살의 딸이 있는데, 아들과 딸 모두 아직 미혼이다.
연해주에 온지는 6년째.
그동안 농사도 해봤지만 잘 안되고, 시내에 나가 집수리 일을 주로 했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가장 많은 일을 맡고 있고, 부인은 이곳 센터의 주방일을 하고 있다.
아들은 그동안 건축 공사일을 하다가, 얼마전 부터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다른 고려인 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부러운 것이 없이 여유있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고려인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뒤 가족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특유의 고분질 기질을 발휘하여, 소련 시절 수많은 영웅들을 탄생시키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슬라바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방이 5개 있는 넓은 집과 집 주위의 나무 숲, 가까이 모여 사는 친척들, 석탄 등이 필요 없이 가스로 난방과 취사가 이루어지는 편리한 생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여가시간 등....
양파농사를 많이 지어서, 농장-정부에서 수매해 가면 그 돈으로 걱정없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의 러시아보다 과거의 소비에트 소련 시절을 그리워 한다.
'그때는 정말 걱정없이 잘 살았는데. 농사만 잘 지으면 부러운 것이 없었는데. 집 앞의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서 설탕을 조금만 넣고 호스를 끼워 물에 담궈 놓으면, 가스만 빠지고 공기는 들어가지 않아서 정말 맛있는 술을 60리터 씩 만들어 놓고 마셨는데... 우리는 '뻘건 술'이라고 불렀는데 한국에서는 뭐라고 불러?' 라고 말 하면서......
걱정없이 잘 살 수 있었던 날은 소비에트 사회가 붕괴되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분리되어 국경이 생기고 마찰이 생기며 함께 붕괴되고 말았다.
넓은 들에 심은 양파는 아무도 사갈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국가와 국가로 분리 되며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간의 교역이 없어진 것이다.
전에는 양파를 심어 잘 키우면, 잘 살수 있었는데, 지금은 양파를 잘 키워도 팔 곳이 없어진 것이다.
요즈음 월 100달러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주 잘 사는 수준이라는 게, 우즈베키스탄에서 교사를 하다가 결혼을 해서 농사짓는 남편 따라 이곳에 온지 채 1년이 안되는, 함께 일하고 있는 22살 새댁의 말이다.
물가는 싸지만, 아무리 싸도 그 돈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고려인 들이 특히 농업부문에 대부분 종사를 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더욱 커졌는 지도 모른다.
다른 공업이나 유통분야와는 달리 농업은 그 시기를 놓지면, 아무것도 안 남고 버려야 하는 것이니까...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공용어가 러시아어에서 우즈벡어로 바뀐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나마 어느 정도 우즈벡어를 알아 들을 수 있지만, 젊은 자녀들은 순수하게 러시아어 만을 배웠기 때문에 전혀 의사소통이 될 수 없게 되어, 언어체계가 달라진 사회에서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신도 힘들지만, 자녀들의 앞날이 막막해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결론은 아이들이 언어장벽이나 기타 기회의 문제에서 차별을 받지 않아도 되는 러시아로의 이주일 수 밖에 없었다. 과거 선조들이 자리 잡았던 연해주로의 귀환......

그 넓은 집을 처분하고 나니, 간단한 이삿짐 부치고 비행기 타고 오는 여비로 쓰고 나면 남는 것은 손잡고 함께 온 가족들의 빈 손 뿐....
- 요즈음 방 6개가 있는 큰 집을 처분하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2,000달러 남짓, 그걸로 이삿짐 부치고, 1인 700달러씩하는 여비쓰고 나면,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어떻게 이런데서 살수 있을까 싶은 작고 낡은 집.... 그리고 겨울이면 가스난방은 커녕 석탄과 장작을 사서 때야 하는 생활. 돌아보면 모든 것이 불편함 뿐.... 그리고 가족이 살아가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힘들 나날들.... 몇년씩 걸리는 러시아 국적의 회복 등.....

그래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조그만 기회라도 생기면, 연해주로 귀향(?)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의 1명인 22살 새댁은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나이에 걸맞지 않는 고민속에 지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친정 부모와 여동생, 그리고 할머니가 그곳에서 살기가 힘들어, 연해주로 오고 싶어하니까, 한국의 '벼룩시장' 같은 정보신문을 사서 틈만 나면 집 매물을 전화로 알아보고, 좀 더 싼 항공편이 없는가 알아보고 있다.
방 6개짜리 크고 아름다운 집을 부모는 2만달러를 받기를 희망하지만, 그 곳 기준으로는 너무 높은 가격이라 어찌 될 지 모르겠단다. 아버지가 건축일을 했으니, 이곳에 와도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하는데, 근래에 이곳도 집값이 많이 올라 도시 근교에서는 방 2~3개 짜리 구하기도 쉽지가 않은 현실이니까....
부모가 자동차를 팔아서 4식구 여비에 보태고, 할머니가 사는 작은 아파트를 팔면 이삿짐 컨테이너 비용으로 쓰고, 집이 희망가격으로 팔린다 해도 여기서 집 사서 고치고, 필요한 거 장만하기에 빠듯하니, 먹고 사는 것도 걱정이고... 둘째 딸 또래 되는 한국에서는 아이들(?)에 속하는 한국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현실과 고민에 새댁의 얼굴은 무겁기만 한게, 고려인들이 처한 현실이 그대로 얼굴에 비쳐지고 있다.

'고려인은 바위를 위에 올려놔도 살아난다'라는 이곳의 말이 있듯이, 그럼에도 그들은 어려움을 탓할 한가로움이 없이 씩씩하게 그리고 장기적인 낙관 속에 살아 가고 있다.
먼저 온 가족이 1년 열심히 일해서 돈이 좀 모이면, 가족을 한 가족 씩 차례로 불러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게 하며, 선발대가 본대의 앞에서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만들며 헤쳐나가듯 하는 것이다.

이들의 희망찾기와 희망만들고 나누기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옆에서 함께 따라가며 살아가는 나의 삶에도 많은 배움과 도움이 되고, 보람이 되고 있다.

다시 송 슬라바의 이야기.
그는 두달전 의료봉사단의 혈당조사에서 심각할 정도의 당뇨수치가 나왔다.
그와 가족의 충격은 컸다.
거의 매일 2리터 맥주 한병, 한끼라도 안 먹으면 허기져서 못살 것같은 고기와 계란등, 항상 옆에 달고 다니던 사탕과 군것질등의 식생활의 결과 였다.
주위에서 식생활을 바꿀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사탕등의 군것질과 육식, 그리고 술등을 끊고 잡곡밥을 먹으라고 했다.
나는 매일 양파를 1개씩 반드시 먹으라고 했다.
그 결과 두달이 지난 지금은 혈당이 정상이 되었고, 처음에는 고기와 술생각이 많이 났는데, 지금은 별로 입에 당기지 않는다고 한다.

고기를 매일 먹지 않고 사람이 살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고 살아왔던 그의 건강찾기를 위한 노력은, 한사람의 건강회복을 떠나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사진에서 처럼 친한 친구의 머리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깎아줄 수 있을까 궁리하며, 이발기계를 쥐고 있는 슬라바의 순수하고 진지한 얼굴 속에 우리들의 관계맺기와 함께하는 노력의 아름다운 결과가 어렴풋이 보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한장의 사진은 고등학교선배이기도한 이종수 님 - 사회연대은행 운영위원장 - 이 지난 6월에 와서 사회연대은행에서 올해부터 실시한 고려인의 농업정착을 위한 소액 대부 (3년간의 무이자 대출)를 위한 기금 (1가구당 3000불 씩 총4만불)을 전달하는 사진입니다.

지난 석달간의 연해주 생활 중 일부를 적었습니다.

연해주에서 장 민 석

Article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