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3> 사색의 향기 칼럼 "연해주고려인이야기"

by 관리자 posted Nov 0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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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평화연대와 사색의 향기과 자매결연을 맺고 사색의 향기 "향기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앞으로 연해주고려인이야기를 통해 120만명 사색의 향기 회원을 대상으로 메일을 보냅니다. 동북아칼럼_타이틀이미지 copy.jpg

초기 연해주 한인이주사와 독립운동 I 

- 김승력(동북아평화연대 연해주사무국장)


1. 연해주와의 인연

10대 내 세상의 전부는 첫사랑이었다. 아파도 오직 그것 때문에 울었고, 행복해도 오직 그것 때문에 웃었다. 20대에 들어서서는 부조리하다고 느낀 세상과의 싸움이 전부였다. 아스팔트에서 밤을 새고, 어둡고 허름한 술집에서 옳다고 믿는 것들을 향해 건배를 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돌멩이를 들었다. 그렇게 서른이 되던 해 나는 망해버렸다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을 눈으로 한 번 확인하지 않으면 30대란 삶의 무게를 버티지 못 할 것 같았다. 남대문 시장에서 무작정 배낭하나 사서는 덜렁 메고 그렇게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다. 그리고 어느 사이 12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다.
 
 30대를 고스란히 러시아 연해주 땅에 묻게 되리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어느날 문득 돌아보니 내 서른의 추억들이 연해주 벌판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나타샤, 안드레이, 니꼴라이, 아나스타샤 낮선 이국의 이름들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되어 있었고 나도 그들 삶의 한 부분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10년 이상이나 묶어 놓고 있었던 것이 그 낮설던 이국의 이름들은 아니었다. 그들 속에서 만난 러시아의 김, 강, 최, 리, 나와 비슷한 성을 쓰고 있는 고려인이라 불리는 동포들, 우리와 너무 닮아 있으면서도 또 그렇게 너무나 다른 사람들...
 어떻게 이렇게 몰랐을까? 이 무지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호기심에 들춰 보기 시작한 고려인 동포사회는 다시 삼십대의 전부가 되었고 그렇게 10여년을 묻고 답하며 정신없이 살다 돌아보니 홀연 마흔의 강가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30대를 버티어 왔던 연해주에서의 화두들 속에서 알게 된 사실들 중에 오늘은 강제이주 전까지 초기 연해주 한인 사회 형성과정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2. 바람이 키운 고려인 동포사회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 서정주의 자화상 중에서

 삶의 팔할이 바람이라던 서정주의 자화상이란 시는 고려인 동포사회를 닮았다. ‘바다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는 구절에서 ‘바다’란 단어를 ‘벌판’으로만 바꾸면 영락없이 고려인 동포사회 초기 역사 속 한 구석을 들여다보는 착각에 빠져버린다.
 
 한반도에 갑오년 농민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한 두 세대 전, 숨을 다해 가는 폭정의 조선에서도 버림받고 차별받던 함경도의 농민들에게 대기근이 찾아든다. 계봉우의 「아령실기」에는 기사흉년(1869년) 함경도 일대에서 한 줌의 벼도 찾아 볼 수 없는 참혹한 기근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두만강 너머 보이는 인적 없는 허허 벌판 연해주를 곁에 두고도 함경도 농민들은 땅이 없어 종이 되어야 했고 기근에 굶어 죽어가야 했다. 두만강 넘어 최가네가 산다더라, 거긴 땅이 있다더라, 아라사 군인들이 비적들을 지켜준다더라 소문들만 무성한 바람처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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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을 넘는 한민족
 
 역사 속에 기록된 기사흉년(1896년)은 음력 7월 강풍을 동반한 폭우 때문이었으며, 특히 함경도 지방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이때 미국 상선 하나가 웅기만에 표류해 오자 주민들은 주린 배를 참다못해 침몰한 배에 있던 물건들을 마음대로 나누어 가졌다. 소식을 듣고 관에서 이를 조사하러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함경도 경흥 읍민 96가구는 그대로 있다간 어차피 관원의 곤장에 맞아 죽든 굶어 죽는다며 죽음을 각오한 탈출을 결행, 음력 11월 두만강을 건너 이미 형성되어 있던 연해주 한인촌 지신허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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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신허

 연해주가 러시아 땅이 되기 전 청나라에 속해 있을 때부터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몰래 건너가 농사를 짓다 돌아오곤 했지만 청나라의 엄한 봉금령(황제가 발원한 신성한 지역으로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령) 때문에 정착할 수는 없었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 땅이 되면서 연해주에 본격적인 한인 마을이 생겨났다. 러시아는 광활한 연해주 땅을 개척해 군대에 식량을 공급할 농민들이 필요했고 기근에 허덕이던 조선의 농민들은 땅이 필요했다. 연해주 한인 첫 마을 지신허는 그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이주 초기 몇십 호 안 되는 지신허 마을 한겨울에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본국 100여 호의 유민들은 마을을 일시에 혼란에 빠뜨렸다. 러시아 당국도 물밀듯 몰려드는 이주민들의 예기치 못한 대이주에 당황하며 대책 마련에 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측 자료에 따르면 1869년 11월과 12월 사이에 4500명이 국경을 넘어왔다고 한다. 처음엔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설득했지만 유민들은 쇄국의 법이 엄한 조선에 돌아가면 죽게 될 거라며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며 송환을 거부했다. 러시아도 새롭게 얻은 빈 땅을 일굴 노동력이 필요해 결국 이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고려인 정착지를 확대시켜 유민들을 연해주 곳곳으로 이주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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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정착사진

 그리고 같은 해 지신허를 개척했던 최운보라는 사람이 빈민 35가구를 이끌고 추풍(수이푼)지역으로 이동한 것이 근대 연해주 내륙 고려인 마을의 연원이 된다. 다음해에도 70가구 이상이 러시아 관리의 지도 하에 추풍(연해주 내륙지방)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해서 생겨진 추풍지역의 뿌칠로브까, 시넬리꼬보, 지신허 삼대 조선인 대촌을 ‘추풍삼사’라고 하며 근대 한인 대륙 이민사의 첫 장을 장식한다.


3. 망국과 독립운동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2차 대규모 한인 이주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함경도 일대뿐만이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연해주로 독립 운동가들이 몰려든다. 이상설, 안중근, 신채호, 홍범도 등 독립운동사의 내노라하는 거목들은 거의 모두 연해주 신한촌에 와 국권회복을 위한 필사의 결의를 다진다. 
 한줌의 친일세력이 찬동한 경술국치를 조선의 인민과 지성인들은 인정할 수 없다며 성명회를 조직하고 세계에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린다. 이어 수많은 의병과 대한광복군, 독립군을 두만강 넘어 조선으로 보내고 상해 임시정부보다 앞서는 최초의 임시정부 국민의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조선과 연해주에 맞닿은 두만강 일대를 독립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한 해조신문, 대동공보, 대동신보, 대양보, 권업신문 등 한글신문의 발간, 계동학교, 대한학교, 한민족학교 등 한인학교의 설립, 거류민회, 한민회 등 자치기관의 조직, 공립협회, 국민회, 권업회 등 민족운동단체의 조직을 통하여 한인사회의 민족의식화를 촉진함으로써 연해주 지역을 명실상부한 대륙 한인사의 중심지, 독립운동사의 중심지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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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그 밀사

 아직도 연해주에는 곳곳에 독립운동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다. 내가 사는 우수리스크 인근 솔빈강 가에는 이상설 선생의 비석이 발해산성을 마주보며 외롭게 서있다. ‘나는 나라를 빼앗긴 죄인이다, 죽으면 무덤도 쓰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아라. 남아 있는 동지들은 조국의 광복을 꼭 이루라.’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후대가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얻어 세워 놓은 유허비이다. 
 최초의 임시정부였던 국민회의 회의실도 세월의 때가 앉은 그대로이고, 안중근 의사의 배후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참변 때 일제에 의해 처형될 때까지 살았던 집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상해 통합임시정부의 교통총장에 임명되었던 문창범 선생 집도 바로 곁에 있다.

 연해주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은 이렇게 냉전시기 교육을 받고 자란 무지에서 비롯된 부채감이 더해가는 과정이었다. 이후 1937년 근대 한인사의 가장 참혹했던 비극 한인강제이주와 소련 와해 후 재이주하는 바람 같은 동포사회의 어려움과 대면하는 순간순간 나는 연해주에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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