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22> 사색의 향기 칼럼 "연해주 고려인 이야기 2"

by 관리자 posted Nov 0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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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연해주 한인이주사와 독립운동 2


비밀문서 No.1428-32cc - 근대 한인 이주사 최대의 비극
- 김승력(동북아평화연대 연해주사무국장)



1. 지붕 위의 바이올린
  
 
왠지 근사하게 느껴지는 제목 때문에 찾아보았다가 그만 넋을 빼앗겨 버렸던 뮤지컬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고 ‘전통’이란 단어를 외쳐대던 주인공 테비에의 영화 속 음률이 오랫동안 귓전에 맴돌았었다,
  운명의 순간 마다 나타나 유태민족의 뒤를 따라다니는 영화 속 바이올리니스트는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의 신성한 자유를 제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부 권력, 관습, 전통 따위들에 대한 조소일까? 이방인으로 쫓겨 다니며 살아야 했던 슬픈 역사에 대한 애도일까? 아니면 비참한 역사에 대한 순응일까? 수수께끼를 풀듯 영화에 몰입해가다 진흙탕 길, 유태인들이 수레를 끌고 밀며 정든 고향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느새 감정이입 돼 눈물을 질금거리기도 했다. 혁명의 혼란기 강제이주로 수난을 당해야 했던 러시아 유태인에 대한 궁금증과 연민의 감정도 마음 한구석에 피어올랐었다.
  마침내 러시아에 도착해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이발 기술을 배우던 유태인 친구를 처음 사귀고 ‘러시아에서 유태인 친구에게 머리를 깎았노라’ 이국 생활의 허영에 찬 편지를 여기저기 쓰기도 했었다. 젊은 시절 우연히 본 ‘지붕위에 바이올린’이란 한 편의 영화는 그렇게 생활 속에 이런 저런 작은 영향들을 끼치며 기억의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 영화 속 유태인들의 강제이주 보다 더 비참했던 강제이주가 우리민족 근대사에 있었음을 알고는 얼마나 분노했는지... 나는 지금 영화가 아닌 실체로서 1937년 끔찍했던 강제이주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미국에서의 재회를 약속하며 러시아 유태인 마을을 떠나던 테비에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이 불안 속에 추방당하고 철저히 사전에 도륙되었던 우리 할어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
 사람들은 대부분 유태인이 당했던 홀로코스트와 슬픈 역사는 기억하며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의 이야기는 모르거나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그랬듯이...



2. 60여 년간 극비에 부쳐졌던 비밀문서
 


  러시아에서 스탈린에 대한 평가와 향수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박대통령을 이해하려는 방식과 비슷하다. 비록 강압적인 독재는 하였으나 어려운 시기 러시아를 승전국으로 이끌고 경제발전을 이룩한 철권통치가... 요즘도 간간히 스탈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뉴스와 나란히 그가 자행한 끔찍한 악행의 비밀들이 해금되어 다큐멘터리로 방송되곤 한다. 그와 함께 혁명의 시절을 이끌었던 쌍두마차 몰로토프는 혁명의 선배로 쏘연방 인민의회를 대표하며 세계 최초 신생 사회주의 공화국을 이끌었던 세계적 지도자이다.  
 
  세계사에서 이 두 명의 지도자를 어떻게 평가하든 한민족 근대 이주사 있어서 내게 분명한 것은, 이 둘은 악마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극동 국경지역으로부터의 한인 이주에 대해’라고 시작하는 문서 No.1428-32cc에 서명하고 실행을 명령한 자들. 1937년 8월 21일, 순박한 한인 농부들의 평화로운 연해주 들판을 한 순간에 통한과 절망의 바다로 뒤엎어 놓은 악귀일 뿐이다.
  1937년 본격적인 강제이주를 명령하기 전 이들은 먼저 일단의 한인들을 시험 삼아 중앙아시아로 유형 보내며 악령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1935년에 기식은 얼마 없으나 당원이었고 로동돌격대원이었고 어물가공 트레스트의 작업반장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체포당하였다. 어머니는 집에 있거나 아버지를 따라 류형지로 가야 하였다. 어머니는 류형지로 같이 가는 길을 택하였다.…류형가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그들을 가족들과 함께 모두 태우자면 차량이 근 쉰 개나 필요하였다. 남자들은 호위병들이 지키는 칸들을 탔고 식구들은 다른 칸들을 탔다.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는데 삼림들이 끝나고 조선 사람들이 난생 처음 보는 까자흐스딴의 반사막이 시작되었다. 낯선 토피로 쌓은 묘들이 눈을 끌었다. 녀자들은 더 참기 못하고 눈물을 자꾸 훔치더니 나중에는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녀자들을 따라 우리 아이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

                                            -'쏘련사람의 참회', <쏘련여성>, 1990 중에서 김 스테판

 
 그래도 김 스테판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이다. 강제이주는 한인 지식인의 사전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조프쉬나’로 불리며 악명 높았던 스탈린 대숙청 바람에 휩쓸려 1936년부터 2500여명의 한인 인텔리들은 이유도 모른 채 체포되어 강제 이주 전 정지작업으로 비밀 감옥에 갇혀있다 처참히 살해당했다. 낙동강으로 유명한 작가인 조명희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간첩이란 통한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강제이주 결정이 이루어진 뒤에도 한인 지도자들의 처형은 계속 되었다. 명령 4일 만에 강제이주 집행책임자인 예조프는 -대숙청을 뜻하는 ‘예조프쉬나’라는 명칭도 스탈린의 살인기계였던 예조프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하바로프스크 내무인민위원국 책임자인 리슈코프에게 한인 반혁명 분자 체포 각서를 발송하였고, 이에 따라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간 수천 명에 달하는 한인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한 사회를 중세 마녀 사냥하듯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은 다음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완전히 무장 해제시킨 후 공포가 정점에 달했을 때 한인 강제이주는 이루어졌다. 20만이나 되는 사회를 조직적으로  말살시키기 위해 그들은 악마가 돼야했고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두려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주를 품에 안은 채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녹슨 화물차에 초식동물처럼 실려 낯선 대륙을 횡단하며 죽어가야 했다. 



3. 시베리아 횡단열차
 


  ‘오늘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승객들에게 철로를 따라 펼쳐진 일찍 잠든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의 묘는 보이자 않는다...규모나 정도 면에서 끔찍한 대학살은 중세시대 종교재판과도 비길 바가 못된다...감옥과 수용소에서 억울하게 총살당한 한인 일 세대들의 영정에, 1937년 강제이주 기간 동안 이름 없이 생을 마감한 모든 이들의 거룩한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 문서로 본 반세기 후의 진실, 러시아 한인 강제이주사 저자 김 블라지미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시골마을에서 김 블라지미르를 만난 건 2007년 5월이었다.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진행하는 고려인 농업정착사업의 일환으로 그곳에 갔을 때였다. 연해주로 다시 돌아오길 원하는 고려인 가정을 도와 강제이주 당했던 그 길을 거슬러 올라 역이주 시키는 ‘귀향’이라는 프로그램의 사전 답사 차였다
 잘 가꾸어놓은 늙은 살구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저 혼자 떨어지는 살구들을 주워 먹으며 우리는 마치 여러 번 만난 사람인양 정겹게 오래 얘기를 나누었다. 이미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익숙한 덕분이었다.
 고아로 태어나 강제이주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대학자로 입신하기까지 그의 인생역정은 짐작만으로도 한 편의 대하소설이었다. 나는 그가 겪었을 삶의 고난을 오랜 시간이 지나 시민단체 일이란 것을 하며 몇 권 안되는 책과 증언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인들의 강제이주는 스탈린 시대의 대표적인 테러기관이었던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주는 사실상 강제수용의 형태로 의도되었다. 이주 자체가 강제였을 뿐만 아니라 이주 후에도 정착 구역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일종의 수용소 개념으로 추진되었다.
 
 각서 No.28519호에는 한인이주를 철저하게 이행하기 위한 조치가 열거되어 있다. 그 각서는 특정지역에 한인 거류를 금지하자는 것, 극동군에 배속되어 있는 한인들을 강제 전역시키자는 것, 그리고 한인들이 자유로이 여행을 할 수 없도록 한인들의 거주제한을 하자는 등의 자세한 지침이 적혀있다. 이러한 거주지 제한은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에야 사라졌다. 수송열차의 승선 시에는 신분증을 압수하고 도주를 못하도록 감시자를 붙이도록 했다. 이 정도면 죄수를 수송하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한인들이 수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물칸을 3층으로 나누어 가족 단위로 한 량에 100여 명이 들어갔으며, 이런 차량을 20여칸에서 100칸까지 연결한 기차가 한인들을 수송하였다. 식량 배급은 없었으며, 화장실도 없었다. 기관차에 급수하기 위해 기차가 머물면 사람들은 물과 먹을거리를 구하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3층으로 된 기차에서는 허리를 마음대로 펼 수도 없었고 의료진도 없어서 아이와 노인들 상당수가 길에서 객사당해야 했다. 다음은 고려인들의 증언이다. 
   

 ‘수일 내에 짐을 싸라는 명령으로 우리는 정착지도 모르고 화물을 싣는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수송열차 행렬은 다시 옮겨져 가족들은 흩어지고 이주도중 수백 명이 체포 또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거대한 비극의 수송열차는 아시아대륙의 한쪽 끝으로부터 다른 끝까지 한 달여를 갔습니다. 행선지도 없고 탑승원도 누구인지 모르고 수송열차의 번호도 없는 유령 열차와 같았지요.
 열차가 석탄을 싣기 위해 멈추어 있는 동안 사람들은 물을 끓여 밥을 해먹었거나 볼일을 보고, 갑작스럽게 기차가 떠나는 바람에 또 몇몇 사람들은 기차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수송도중 번진 홍역은 60%가 넘는 어린 아이들이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1938년 봄까지 중앙아시아로 옮겨진 한인 중 60%는 다시 재이주 당했습니다. 작게는 도보로 20km 길게는 철도로 4,000km 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영구 정착지로 이동한 것이지요.
 식량은 떨어지고 겨울의 거센 바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을 끝없이 땅을 갈고 해가 뜨면 벌판으로 나와 일을 했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식구들이 한사람씩 죽어나갔습니다. 온 동네가 사람들의 통곡으로 가득했지만 한인들은 일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사진으로 보는 고려인사 중에서

 
그뿐입니까?! 의료방조가 전혀 없다보니 갑자기 바뀌운 기후와 풍토, 물로 하여 로인들과 어린애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하루밤 사이에 한 부락에서 6-7명이 사망하였읍니다. 그 때에 한 3년이 지나니 마을에 어린애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저도 그 때 아이를 잃었습니다. l934년부터 1937년 이주 말까지 재쏘 조선인 인구의 절반이 줄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좀 한다 하는 지식인들이나 조선에서 넘어온 망명객들, 일깨나 한다 하는 사람이면 다 잡아다 즉결재판에 의하여 일본놈의 간첩이라는 루명을 씌워 없애치운 것은 지금와서 비밀이 아닙니다. 거기에다 이주 당시와 이주 후에 죽은 사람들의 머리수를 합하면 절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아니면 요행수로 살아남은 사람들이였읍니다.

                                                                                - <레닌기치신문>, 1990.6.13



4. 해는 지고 다시 해는 떠오르고
 

 고향땅에서 6,000km를 떠밀려와 황량한 늪지에 버려진 한인들이 스산한 늦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처음 한 소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제 살았다’ 였다고 한다.
 갈밭 아래로 고인 물이 반짝였기 때문이란다. 갈밭을 베고 물길을 내자. 벼를 심을 수 있으니 이 겨울만 버티면 그래도 살 수 있겠다는 참으로 질긴 농부의 숨으로 뱉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일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처럼 살아난다. 땅굴을 파고 토굴 속에서 겨울을 버티며 매일 아침 머리위로 거적을 들어 올리며 누가 죽었는지 확인하는 게 안부를 묻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에는 가산을 다 버리면서도 생명처럼 품고 온 씨앗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3년이 지나니 마을에 어린아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땅에서 고려인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집을 짓고 뿌릴 내리며 농업의 기적을 일구어 낸다. 소련 뿐 만 아니라 당시 세계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집단농장들을 만들어 수많은 노동 영웅들을 배출한다. 그들은 소련 농업사의 전설이 되어갔고 러시아 사람들은 그런 그들에게 바위 위에 앉아도 풀이 돋게 하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부쳐주었다.

 지붕위에 바이올린에서 주인공 테비에는 영화 속에서 또 이렇게 외쳤다. ‘해는지고, 또 다시 해는 떠오르고’ 어쩌면 많이 닮았을 유태인과 고려인의 강제이주 역사지만 유태인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세우고 모두를 품에 안았다. 

 소련 와해 후 다시 연해주와 시베리아 대륙 곳곳으로 이주하며 지금도 바람처럼 떠도는 고려인 동포들의 해는 언제쯤 중천에 솟아오르게 될까?...누가 그들을 품에 안아야 할까?...

연해주 한인들의 해는 아직 떠오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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