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IMA 월례강좌를 다녀와서

by 관리자 posted Jan 2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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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MA 월례강좌를 다녀와서
김숙영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 나는 월례강좌에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탔다. 잠시 후, 도착한 강연장에는 많은 기업인들이 모여있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자신의 삶에 채찍질을 늦추지 않는 기업인들의 부지런함과 열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짧게 조식을 마친 후, 강의자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단단한 모습의 박환 교수님이 단상에 올라섰다.
힘 있는 말투와 분명한 어조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860년대 초 고단한 삶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희미하나마 나는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이래, 1930년대에는 이주자의 수가 20만 명에 다다를 정도로 많아었다는 그들의 힘겹고도 흥미로운 삶의 이야기....

삶의 고단함과 힘겨움을 피해, 다다른 이방 땅, 그러나 한인들은 그 땅에서도 결코 조국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 속, 당시 재러동포들의 모습은 그들의 나라사랑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해 주었다.
국권을 빼앗긴 나라를 돕기 위해, 이국 땅에서 마음을 모아 한 뜻을 이루었던 우리의 선조들, 그들의 활발했던 항일운동은, 훗날 광복의 밑거름이 될 만큼, 조국에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애닯은 나라사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역사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다.
애초부터 러시아 재러동포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시작한 연구가 아니었었다는 박환교수님은, 항일운동의 역사를 연구하다보니, 자주 러시아의 한인들과 연결되어지는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관심을 갖고 후손들을 찾아다니며 연구하다보니, 조선독립에 있어, 재러 한인들의 고귀한 희생과 크나큰 역할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연해주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병장 ‘최재형 선생’에 대한 질문에, 교수님은 열띤 모습으로, 선생의 삶과 항일운동에 대한 모습들을 자세히 소개해 주셨는데, 소련연방시절 죽임을 당한 후손들 외에, 남은 자녀들이 각각 다른 나라들로 흩어져 어려운 삶의 환경에 처해 살았던 이야기들과 함께, ‘최재형 선생’이 보여준 열정적인 삶의 모습을 힘 있게 전해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오자, 밝은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한 속도감과 분주함을 맞닥뜨리며, 나는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이, 오래전, 먼 이국땅에서 나라를 사랑했던 이들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새삼스레 기억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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