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서 부산까지···유일한 장벽은 남북이었다.

by 관리자 posted Sep 0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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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행 법무법인동안 대표변호사 

지난 8월 19일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설렘에 잠을 설친 나는 새벽 서울 남산 안중근 기념관으로 향하였다. <고려인 이주 150주년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 <서울-부산 국민랠리> 에 사단법인 희망래일 감사 자격으로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사단법인 희망래일은 남북철도 연결을 통한 남북한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를 증대시켜 궁극적으로 한반도 통합의 기초를 닦자는 목표하에 설립되었다. 매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를 탐방하는 '유라시아철도 평화대장정'과 '북한철도 침목 보내기 운동' 등을 벌여오고 있다.
너무 일찍 왔는지 안중근 기념관 앞 광장에는 행사 진행요원도 아직 오지 않았고, 깃발을 들고 힘차게 걸어가는 선생의 동상과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이라는 선생의 친필이 새겨진 비석만이 가랑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잠시 후 '최재형 장학회'의 김창송 이사장님이 보이신다. 김 이사장님과는 지난 2010년 9월 '추석맞이 고려인 문화한마당' 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를 함께 방문한 인연이 있다. 그렇다면 최재형 선생은 어떤 분이신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를 저격한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권총과 거사비용을 제공한 분이 바로 최재형 선생이시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거사 뒤에 김구 선생이 계셨다면,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의 쾌거 뒤에는 최재형 선생이 조용히 서 계신 것이다.


▲ '최재형 장학회'의 김창송(오른쪽) 이사장과 조민행 변호사

최재형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나 1869년 가족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지신허(地新墟)로 이주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신 후 무역과 러시아 군대 납품 등을 통하여 큰 재산을 모으셨다. 민족정신에 눈을 뜨신 선생은 연해주 독립운동단체의 핵심인 동의회(同義會)의 총장으로서 의병활동을 이끌었고, 러시아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라는 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에는 안 의사의 부인과 자식들을 돌보았다. 일본 관헌의 눈엣가시였던 선생은 1920년 4월 5일 일본이 일으킨 경신참변(庚申慘變) 때에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2010년 가을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처음 접한 김창송 회장은 자신의 노년의 롤 모델로 최재형 선생을 삼고, 2011년 6월 ‘최재형 장학회’를 설립하여 고려인 대학생들에게 장학금 지원 및 최재형 선생 선양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김창송 회장님과 장학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기념관 앞에 깃발을 꼽은 휠체어가 나타났다. 휠체어의 주인공은 뇌성마비 1급 중증 장애인인 최창현이라는 분이었다. 통일을 기원하며 휠체어로 1년 3개월간 유럽 25,000km를 주파하여 휠체어 최장거리횡단 세계 기네스 기록 보유자이다. 이번 국민랠리에 참가하시냐는 내 질문에 입술 주위는 물론 얼굴 전체 근육을 힘겹게 사용하며 혼신을 다해 대답한다.
  "내가 장애인이지만 한반도도 휠체어를 타고 있어요. 남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백두에서 한라까지 휠체어를 타고 갈 겁니다!"  
  예정보다 늦은 9시 30분경 1만5000km 대륙을 달려온 고려인 30여 명과 국민랠리 참가단과 자원봉사단 8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출정식이 거행되었다. 이인제 의원과 정태익 한국외교협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출정식 사회를 본 동북아평화연대의 김종헌 사무국장이 김 에르네스 러시아 오토랠리 조직위원회 단장에게 질문하였다.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 일정 중 마지막 일정인 서울–독립기념관-부산 500km 일정에 참여한 국민랠리 대원도 이번 대장정의 대원으로 인정해 줄 수 있습니까?"
김 에르네스 단장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모스크바에서 이곳 까지 온 길에 비하면 서울-부산 간 거리는 옆집에 빵 사러 가는 것이지요?"
  이번 서울-부산 구간에는 러시아 오토랠리 팀 차량 5대와 국민 참여 랠리팀 차량 15대가 참가하였다. 러시아어로 만세를 뜻하는 말인 "우라"를 크게 외친 후 각 차량의 운전자들이 주최 측으로부터 이번 대회의 깃발을 받았다. 나는 정태익 전 러시아 대사로부터 국민랠리 참여 깃발을 건네받았다. 대장정 깃발을 들고 숙연한 마음으로 내 차로 돌아오는데 자꾸만 "한반도도 휠체어를 타고 있어요"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운전석에 앉은 나는 한반도가 앉아있는 휠체어를 벗어던지고 대륙을 향하여 포효하는 심정으로 시동을 걸었다.
  이번 남쪽 행사의 정식 명칭은 <고려인 이주 150주년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 <서울-부산 국민랠리>이다. 고려인이란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등 옛 소련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말한다. 올해는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함경북도 경원이 고향인 최운보, 양응남 두 분이 1863년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지신허(地新墟) 마을에 정착한 것이 우리 민족 러시아 이주의 시작이다. 이주년도를 기준으로 하면 올해가 이주 151주년이 되지만, 러시아 정부가 1864년에 정식으로 이주허가를 하였으므로 올해를 러시아 이주 150주년으로 기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려인 랠리 팀은 지난 7월 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발행사를 가진 것을 시작으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두만강 인근 국경도시인 하산에 도착했다. 하산에서 자동차가 아니라 나진-하산 철도를 통해 8월 9일 북한 나선(나진 선봉)시 두만강역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어서 10일에는 백두산에 올라 출정식을 가졌고, 14일에는 개성에서 평화음악회, 15일에는 평양에서 8.15 경축행사에 참석한 후 16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로 들어왔다.


▲ 유라시아 대륙을 달려온 차량

<서울-부산 국민랠리> 첫 번째 목적지인 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50분이었다. 참가자들은 이 땅의 독립을 위하여 돌아가신 순국선열들에게 묵념 및 헌화를 하였다. 중앙식당에서 오찬을 한 후에 광복 69주년 및 러시아 한인 이주 15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기념관이 기획한 "황야에서 들꽃을 피우다"라는 특별전시회를 관람하였다. 그 후 2시 30분 독립기념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우리 차는 7시 20분경 목적지인 아르피나 부산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부산 도착이 예정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부산역에서 개최하기로 예정되었던 부산시민 환영행사가 아쉽게도 취소되었다. 부산 시장이 주최한 환영 만찬에서는 서병수 부산 시장의 축사와, 김석준 부산시 교육감의 환영사가 있었다.
  지난 백 년 민족 대수난의 시기에 고통을 겪지 않은 조선 백성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중에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은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고려인들은 19세기 말 굶주림과 가렴주구를 피하여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 이후에는 최재형 이상설 선생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9년 3.1운동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국민의회라는 최초의 임시정부를 세웠다.
  러시아 10월 혁명 기간 동안에는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병한 일본에 의하여 온갖 핍박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신한촌을 습격하여 많은 고려인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37년에는 '일제 간첩'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처형당하였으며,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영문도 모르게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태워져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하였다. 그 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고려인들은 '바위에도 풀이 나게 한다'는 억척스러움과 근면함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뿌리를 내리는가 싶었지만,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다시 무국적자로 유라시아 대륙을 떠돌거나 연해주로 다시 돌아오는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죽음의 길을 넘어온 고려인들이 8.15 광복절에 즈음하여 대륙을 가로질러 한반도에 왔다. 강제이주 당하였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거슬러 모스크바를 출발 타슈켄트-알마티-이르쿠츠크-치타-하바롭스크-우수리스크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 고려인들의 쾌거는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재외동포가 다수의 민간인 차량을 이끌고 휴전선을 통과하였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역사적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홀로 울어 본 사람만이 타인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 신한촌에서, 자유시에서, 아무르 강가에서 그리고 강제로 태워진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멈추던 이름 모를 간이역에서 홀로 울던 고려인들이, 때로는 두려움과 참담함에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피울음을 삼키던 고려인들이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1) 분단의 장벽을 넘어 우리들 앞으로 왔다.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을 마무리한 김에르네스 단장은 부산 만찬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달콤한 박수를 제가 받고 있지만, 다른 모든 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랠리에 협조하여 준 러시아와 남북한 정부에도 감사드립니다."
  "남과 북이 자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온 이 길로 보다 많은 단체들이 오고 가기를 기대합니다."
  저녁 만찬을 마치고 밤 12시 넘어 우리는 서울로 출발하였다. 새벽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아시안 하이웨이 Asian Hiway AH 1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라는 표지판이 선명하게 두 눈에 들어왔다. 아시안 하이웨이 1번 도로의 일부인 경부고속도로는 언젠가 인도와 터키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 언제일까. 자동차로 서울에서 평양 베이징 울란바토르를 경유하여 모스크바까지 아니 그 넘어 베를린과 파리까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금수강산 한반도는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게 "반도는 사랑하기에 너무 좁다."(2)

□ 필자주석 
1. 참 좋은 당신, 김용택
2. 울란바토르행 버스를 기다리며,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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