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 민족화해

by 관리자 posted Sep 0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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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이주1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사무국장
              동북아평화연대  사무국장  김종헌

“우리는 내일도 달릴것이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키예프, 투르크메니스탄 아슈하바르, 타지크스탄 두산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키르키즈스탄 비슈케크, 카자흐스탄 알마티,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하산, 나진, 백두산, 금강산, 평양, 개성, 서울, 안산, 그리고 부산, 다시 경주와 청송, 안동, 동해. 험난 했던 15000km의 여정이다. 이 일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정을 같이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스크바에서부터 출발한 사람도 있고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연해주에서 합류한 대원도 있고 서울부터 함께한 추진위 관계자들, 자원봉사자들, 서울-부산 국민참여랠리라고 하는 프로그램으로 참여한 시민들도 있다. 지금부터 이처럼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여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고려인이주150주년기념 유라시아 자동차대장정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길게는 49일, 짧게는 휴전선 이남의 9일간의 일정이었다.
나는 그 9일의 일정에 고려인이주1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상임대표 이인제, 이해찬, 정태익 등, 이하 추진위) 사무국장으로 참여했다. 우리의 임무는 이들의 남에서의 일정을 꾸리고 안내하는 일, 게다가 체재비용까지 - 한마디로 온갖 일을 다 맡아서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동북아평화연대(이하 동평)는 지금으로부터 10년전 고려인이주140주년 행사를 기념하고 우스리스크라는 연해주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중심지에 러시아한인이주140주년기념관(현 고려인문화센터)을 지어서 기증하는 일을 했다. 그러한 연고로 이번 추진위에서 동평이 자연스럽게 사무국단체를 맡게 되었다.
최초의 이 랠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작년 연초. 조바실리(전러 고려인연합회 회장)로부터 내년인 2014년에 러시아에서 고려인자발적이주150주년기념사업회가 조직이 되어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여 한반도를 종단하는 랠리를 기획 중이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실 우리단체도 철도나 자동차를 이용한 러시아 종단 프로그램에 직간접으로 참여해 본 경험도 있고 주변에 많은 단체들도 한반도 종단계획과 러시아횡단을 이어서 성사시켜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번번히 북에 막혀서 실패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초로 러시아 쪽에서 온 이 제안에 대해서도 성공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했었다. 

실제 국내에서도 이해찬, 이인제 의원등이 가세해서 국회의원를 포괄하는 고려인150주년기념사업회가 꾸려지고 1월 20일 정식 발족식을 했을 때까지도 이 사업은 비중있게 보고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 사업의 핵심은 북과 남의 통과이고 남북관계의 형국이 풀려가는 방향으로 작동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악화되는 시점에서 바라볼 때 성사 가능성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으로 보였다. 조바실리가 남북에 보낸 서신은 대답없는 메아리로 그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5월경 북으로부터 승인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추진위 관계자들은 모여서 축배를 들면서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남과 북의 오랜 실랑이가 시작된다. 우리 한국정부에서도 자연스럽게 통과승인이 나고 순차적으로 풀릴 거라는 기대와 달리 남북 통과의 협상은 지리멸렬하게 시간을 끌게 되었다. 북이 남측에 어디로 해서 어떻게 내려 보낼 것이라는 확답을 주지 않아 못내려 오게 될 수 있다며 남측은 승인을 할 수 없다고 하고 러시아측은 내려가면 남측이 받으면 되는 것인데 왜 승인을 안해주냐하며 남·북·러 주체들이 6월말까지 지루하게 공방을 시작, 언론에서도 북의 문제로 남북통과가 어려울수 있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렵게 우리정부의 승인이 나오게 되자 이번에는 북이 문제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북이 정치적으로 랠리를 이용하려 한다는 남측기사를 빌미로 남측으로 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때가 7월초, 이 일을 준비하는 추진위 관계자들은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 동안의 준비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고 내려온다고 해도 이 짧은 시간에 준비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자금 문제는 랠리 마지막 동해 출국까지 문제였다. 불과 한달이 채 남지 않은 시간에 제한된 정부의 행정지원과 약간의 지원금으로는 이 행사를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확정된 안이 없고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계획을 가지고 관심을 보이는 기업도 찾기 어려웠다. 어쨌든 최종적으로 원래 통과하려던 8.15일 통과 계획은 무산되었고 다음날 8.16 3시경에 통과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러시아 측 추진위로부터 들을수 있었다.

랠리팀을 맞아야하는 시간이 채 한 달여 남은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정말 정신없이 준비를 맞추어야 했고 마지막 모기업의 후원이 결정되는 행사 일주일전,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8월15일 사무실에 통일부에서 전화가 한통이 울렸다. 개성출입경사무소로 북의 전문이 내려왔는데 3시 입경이 아니라 5시 입경으로 통보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6시에는 국회의장 만찬이 잡혀져 있는데....요즘말로 멘붕이 온다.
부랴부랴 시간을 옮기고 관련기관에 통보하고 8월16일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개성출입경 앞 수많은 기자들이 도열하고 있는 그 순간  고려인랠리팀이 등장하여 김에르네스(랠리팀 단장)가 "우리팀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동차로 북에서 남으로 38선을 넘었습니다." “ 150년 전에 이주했던 고려인이 남긴 역사입니다” 호기롭게 선언한다.
김에르네스는 모스크바의 사업가 집안 출신으로 20여차례 랠리를 경험한 랠리광이기도 하다. 2012년 블라디보스톡에서 APEC이 있었을 때에도 러시아 종단 랠리를 조직한 바 있다.
러시아에서 출발할 때는 7월7일, 남북간에 통과가 불확실했을 때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전할 줄 알았다. 후에 물어보니 이 문제가 반드시 풀릴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어쨌든 그들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로망으로 꿈꾸어 왔던 일을 실질적으로 성사시킨 최초의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 국회의장, 국무총리, 재외동포재단, 서울시, 부산시, 세월호 안산방문 등등 많은 만찬을 거치면서 수많은 공식일정을 다니면서 마지막 동해 출발까지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있었다. 차마 지면으로 풀어내지 못할 일들도 많았고 한국을 방문한 그들과 한국에서의 일정을 준비한 추진위, 정부측의 인사, 방송관계자들, 스폰서 기관 등 랠리를 둘러싼 수 많은 이해당사자들이 랠리를 위해 움직여 주었지만 또 어떤 순간들에서는 서로의 욕망이 충돌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는 랠리에 참여한 사람들, 추진위에 참여한 사람들 내부에도 그러한 충돌이 있었다.  랠리를 150주년 사업으로 승인한 것은 조바실리, 랠리를 직접 조직한 사람은 김에르네스, 여기에 북이 이 사업을 승인하도록 역할을 한 러시아범민련의 김펠릭스까지 세 분은 모두 이 랠리의 주역이면서도 미묘하게 서로 견제하는 관계였다. 사실 이 세명 중 누구 한명이 역할을 못했다면 사실 랠리는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유독 북에서의 환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북에서 본 것 들에 대해 가슴 아프다고도 했다. 북의 자연이 참 아름다웠다고 했다. 북의 거리를 도열한 시민들의 환영인파를 보고 감동했다고 했다. 한 고려인 랠리 참가자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북쪽에서는 통일을 간절히 원한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관계자 이외에 주변의 시민들은 지금 잘 살고 있으니 통일이 절실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로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사실 나도 이 일을 맡으면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그들에게 북식 “감동”이상 우리는 무엇을 줄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에 대해 어떠한 기억을 가지고 갈지 모르겠지만 남측에서 언론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북에 대한 찬양이 나오는 것 아닌가하고 우려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국가가 주관해서 일을 치루는 것과 정부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민간의 조그만 기관이 나서서 맞이하는 것의 차이는 어쩔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랠리팀의 불문율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대접을 받든 무슨 일이 있었든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과 국가, 기관과 조직이 얽혀서 만들어낸 장대한 서사시와 같은 랠리가 
끝이 났다. 아니 러시아에 돌아간 일부의 차량은 다시 자신의 고향까지 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서로 내년을 기약하면서 한국의 광복70주년과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 랠리를 다시 하자고 약속을 주고받았다. 올해의 경험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팀을 맡고 싶지 않다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슴은 왠지 다시 뛰고 있다. 정말 이 랠리의 성공은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가 되어야 하는 것 같다. 한 번의 요행이 아닌 두 번째, 세 번째도 이 길을 갈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종국에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길이 되도록 하는 일.
그러한 그림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가슴이 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는 랠리라고 하는 일은 덜컥 맞고 경험 해보니 내년에는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주책없는 마음이 요동친다.

이 일을 치루는 동안 한국에서 고생하신 수많은 추진위원분들과 자원봉사들에게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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