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과 함께 가는 150년 역사기행 참가기

by 관리자 posted Sep 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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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4일 군포시청앞에서 조선말 의병장 허위선생의 자손인 허블라디슬라브(키르키스탄 거주. 63세)씨와 허벽(서울 창동. 79세)씨 안산시 선부동의 고려인 동포지원단체 너머에서 동행한 최갈리나씨외 5명의 고려인 여성들과 함께 독립기념관에서 개최되는 러시아 한인이주 150주년 특별기획전을 보러 갔다. 이번 행사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와 동북아평화연대, 아시아평화시민네트워크, 너머가 함께 준비하였다.
허위선생의 자손인 두 분은 사촌간인데 1백년의 가족사를 비롯한 당신들이 겪었던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1908년 10월 허위선생이 일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후 가족에게 가해졌던 온갖 박해로 인해 조선을 떠날 수 밖에 없어 차례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정착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독립운동가 출신은 견딜 수 없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해 정착해 사셨다. 1937년에는 스탈린의 강제이주 지시로 우즈베키스탄을 가게 되었고 나중에 키르키스탄까지 가게 되었다고 하셨다. 허벽선생은 부친이 독립운동자금을 구하러 귀국했다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더 거슬러 올라가 가야의 김수로왕과 혼인한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의 후손이라고 하셨다. 고대사에서 현대사까지 연결되는 설명인 셈이다.  안산의 선부동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출신자들이 많이 몰려 사는 곳이다. 너머는 13년동안 연해주에서 고려인 지원사업을 했던 김승력대표가 야간에는 고려인들에게 한글학교를 통해 한글을 가르치고 낮에는 이주생활에서 겪게되는 어려움들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해 오고 있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여성들은 모두 한글학교 학생들이란다. 1년 남짓한 기간인데도 아직 한글이 어렵다고 하신다. 
독립기념관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1시 반이 되어 학예사의 안내로 조선의 망국과 이토히로부미가 강요라고 이에 동조한 ‘을사오적’ 한 을사늑약에서부터 전국적인 의병운동 그리고 의병장 허위의 교수형과 안중근의사의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독립운동 지도자 최재형선생의 활동 등을 설명해 주었다. 고려인 여성 참가자를 위해 허블라디슬라브씨가 통역에 나서 주셨다. 1시간여의 관람을 마치고 150주년 기념 특별전을 찾았다. 조선말의 기근과 수탈을 피해 1860년 시작되는 한인 이주의 역사 자료들이 전시되어 시간여행을 하는 듯 했다. 초기 한일들이 정착하면서 살고 있던 모습들이 생생하게 보였다.  한인사회가 형성되고 조선말 망국으로 이어지던 시기에 연해주와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 독립운동에 나섰던 모습들이 새롭게 인식되었다. 얼마 전 다녀온 이르쿠츠크와 하바로프스크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던 역사현장과 기념조형물들이 연관되면서 떠올랐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주의 정당이 출현하고 독립운동에 새로운 근거지로 자리잡았던 연해주를 중심으로 하는 한인사회의 역사를 이끌었던 최초의 여성사회주의자 김발레리나와 러시아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선생 등 당시 지도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인한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카레스키들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소개되어 있었다. 사진이 없어 전시하지 못해 공백으로 남아있던 러시아 독립운동사의 한 부분에서 조은경학예사의 설명을 듣다가 최갈리나씨는 당시 사회주의운동 지도자 최고려씨가 자신의 할아버지라고 밝히면서 사진도 있다고 하셨다. 고려인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역사 개인사를 돌아보는 심정으로 느껴졌다. 관람을 마치고 다시 뗏골의 중앙아시아 식당 실크로드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허블라디슬라브씨는 고려인 여성들에게 ‘한글을 잘 배우라’ 는 간곡한 당부를 하셨다. 그리고 잊지 않고 이런 기회를 마련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하셨다. 함께 잔을 들고 위하여 대신 ‘울라!’(만세) 를 외쳤고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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