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눕다 경계에 서다 고려인

by 관리자 posted Oct 21, 201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바람에 눕다 경계에 서다 고려인

한금선 사진집
 


'째르빼-니'


러시아어인 이 말은 우리말로 “괜찮아” 혹은 “참아야 해”라는 뜻이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으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은 목적지도 모르는 채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카자흐스탄으로... 6천 킬로미터가 넘는 긴 여정이었다. 이 강제이주 기간 동안에만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다. 어린 자식이 죽으면 열차 미닫이문 밖으로 시신을 버리며 갔다. 도착해서도 굴을 파고 살거나 마굿간에서 살며 굶주림을 견뎠다. 간신히 살려 데려온 자식을 이리가 물어가기도 했다.

기차에서도 죽지 않고, 이리에게도 물려가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이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지금의 고려인 1세대들이다. 이주에서 정착까지의 험난한 시간들을 지나오는 동안, 이들은 “째르빼-니, 째르빼-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서로를 부축했다. 그것은 2세대들에게도 유전되어, 지금도 우즈벡의 고려인들은 삶의 어느 힘겨운 순간과 마주치면 “째르빼-니, 째르빼-니”라고 말한다.

사진가 한금선의 <째르빼니>는, 바로 이 우즈벡의 고려인들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지난 2013년 초여름, 대구 인문사회연구소와 함께 구술 기록과 사진 기록을 위해 ‘우즈벡의 고려인’들을 만났다. 양 니꼴라이, 강 라이사, 박 알렉산드로.... 이름과 성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은 우즈베키스탄에 두고 살지만 여전히 마음은 조선에 둔 사람들,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들을 지닌 채 살아가는 그들의 현재를 사진에 담았다.



고려인들 모습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어르신들과 함께 부대껴온 세간살이, 일상기물과 음식, 밭 등이 주로 등장한다. 아파트 뒤 텃밭을 일구는 할아버지의 곱게 닳은 쟁기, 소시지부터 상추쌈, 부추나물, 고봉밥 접시 등이 차려진 단오 잔치상, 알록달록 문양이 장식된 카펫벽…. 낡았지만 여전히 그들 삶과 마주하는 이 일상사물들의 풍경은 순식간에 집기와 세간을 바꾸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 안부마실을 다니며, 일주일 한번씩 모여서 춤추고 놀기도 하며, 간간이 러시아로 고분질(일년 몇개월을 타지로 떠나 농사짓고 수확해 돌아오는 것)갔다온다는 특유의 건강하게 발효된 삶들이 이 낡은 사물들을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어르신과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이 물건들을 찍곤 했다는 작가가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옷장이 열리는 순간을 장노출로 찍은 것이었다.

불과 3주동안 찍은 사진들로 <째르빼-니>란 사진집(봄날의 책)은 고려인 어르신들의 이 불가사의하면서도 편안한 힘을 두고두고 새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Article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