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부끄럽지 않은 세월이었나

by 관리자 posted Aug 06,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우당 이회영 선생을 아는가? 한말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넷째 형이다. 그는 1896년 항일의병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삼농장을 운영하였으나 일본의 계획적 약탈로 실패하고,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1907년에는 ‘신민회’를 발족하고 ‘헤이그밀사’파견을 주도하였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하자 국외에 독립기지마련을 위해 1910년 일가족 전체가 만주로 망명하였고 전재산(약 600억 원으로 추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으로 운용했다. 이후 1911년 이주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지도를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고 광복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청나라 실권자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를 직접 만나 대한제국의 항일운동에 대한 적극협조를 받아내고 합니하(광화)에 대한독립군 군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가 건립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였으나 1918년 1월 고종의 급사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1919년 베이징[北京]으로, 다시 상하이[上海]로 가는 등 각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전개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1923년부터는 신채호(申采浩),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등과 적극적인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항일운동 행동 조직 '의열단'을 후원하였으며 '신흥학우단'에서 파생된 제2의 행동조직 '다물단'을 조직, 지도하였다.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함께 '재만한족연합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위해 협력하였다. 1931년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남화통신>을 발간하는 한편,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였다. 1932년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배를 타고 가던 도중 상하이 밀정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붙들려 다롄경찰서에서 심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에 추서 받은 바 있다.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조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해방을 이루어냈고, 오늘날에는 광복 70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여러 행사가 잇따른 가운데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종걸 대표가 한 말이 화제가 되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해방 후 70년은 친일과 변절자를 위한 조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회영 선생의 후손으로 그가 한 말을 자세히 써보자면 이렇다. “항일의 역사는 결코 자랑스럽고 영웅적인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15년 이상 현상금 159억을 받고도 목숨을 이겨내셨던 이 나라는 그들의 조국이 아니었고 이 나라를 지켰던 다른 사람들의 조국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70년은 그들의 조국이었습니다. 친일과 변절, 독재가 여전히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은 지난 70년은 그들만의 조국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할 수 있는 발언이었고 충분히 할 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해방 후 7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이룬 업적을 도외시한 과도한 발언이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이 발언이 진정 비판을 받을만한 발언이었을까?70년 동안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과 친일파의 후손들은 상반된 삶을 살아왔다. 어느 쪽이 여유 있고 편한 삶을 살았느냐고 질문한다면 후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즉 독립운동가들의 피로 일궈낸 광복인데 정작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누리지 못하고 친일파의 후손이 누리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 원내대표의 발언을 듣고 비판을 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곡을 찔려 제 발 저린 사람들의 아우성이 아닐까.

  


 한편 이 원내대표는 “항일운동의 중심은 몇몇 저명한 남성들 몫이 되었고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아버지와 남편의 뒷바라지로 기록될 뿐이었다”며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재조명해야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어 “오늘 이 자리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많은 항일의 역사가 다시 발굴되고 기억되고 살아 숨 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덧붙였다.동평도 이 원내대표의 덧붙임 말에 적극적으로 동감하고, 이런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힘쓰며 노력하고 있다. 동평의 노력 중 하나는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와 공동사업 진행(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사업일환) 관련하여 MOU를 체결할 계획이다. 역사에 대한 바로 알기가 필요한 이 때에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 강좌’의 형태로 서울대 학생들에게 우당 이회영 선생의 독립사상과 업적을 기리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그의 삶을 통해 인성교육도 하는 이 강의는 시의 적절한 꼭 필요한 강의이다. 일부 강의는 동평의 회원들에게도 참여 기회를 제공 할 예정이다.




Article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