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역사 시리즈> (2) 3.1운동과 재외동포

by 관리자 posted Mar 1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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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역사 시리즈>

(2) 3.1운동과 재외동포

 강성봉(동북아평화연대 감사,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지난 3월1일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이날 파고다공원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의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만큼 삼일운동이 우리 민족사에서 가지는 의의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삼일운동의 발생, 확산 마무리되는 과정에 당시 미국, 중국, 일본, 연해주 등에 거주하는 해외의 조선민족, 오늘날의 표현으로 보면 ‘재외동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간과되고 있다. 재외동포가 시작하고 재외동포가 마무리 한 운동이 바로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데도 말이다. 삼일운동은 물론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발표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의 세계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부터 이런 세계사적 흐름을 활용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이 어떻게 움직였고, 그 중 재외동포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자 당시 중국에 유학중이던 여운형과 신규식 등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회의에 영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쪽에는 일본어에 유능한 장덕수를 파견했다.
그리고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성으로 가서 활동,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 여운형은 만주 길림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 등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 등 상황을 설명했고, 무오 독립선언에 영향을 주었다.
가장 먼저 1919년 2월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 운동가들 39명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이때가 음력으로 무오년인 1918년 11월(양력 1919년 2월 1일)이었기에 무오 독립 선언으로 불린다.
1919년 2월8일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든 조선 재일 유학생 400 ~ 600여 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이후 2월 한 달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광수에 의하여 조선과 해외에 보도됐으며, 이 사건은 다음 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출처 : 네이버>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3 ·1운동 이후 3개월 간의 전국 독립만세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 횟수는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피체인원수 4만 6948명이며 소각당한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이때 서울의 10개교에서 여학생이 참가한 인원은 1,929명에 이르고 있다.
1913년 3월13일, 중국 길림성 용정의 해란강 강변의 서전대야(瑞甸大野)라고 하는 강변 들판에 삼만 여명의 인파가 모여 들었다. 일본영사관이 바로 옆에 있던 곳이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 특히 원근 각지의 학생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손과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면서 홍수처럼 모이게 되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이어서 거리행진이 시작됐다. 나팔소리, 징소리와 함께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 관계자들은 당황해하면서 시위를 막아줄 것을 중국당국에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아드린 중국당국은 무장병력을 출동시켜서 시위하는 군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현장에서 13명이 죽고 50여명에 부상했다. 용정 3.13 이후 만세 운동은 연변전역에서 맹렬히 터져 올랐다.
3.1운동은 당시 한인 50만여 명이 거주하던 연해주에도 파급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3월 17일 국민의회 회장 문창범이 니콜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운동에 착수하여 11개국의 영사관과 노국관청(露國官廳)에 선언서를 배포하고, 오후 6시부터 학생들이 중심이 돼 여러 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시중을 누비고 다녔다. 일본 총영사관은 러시아 요새사령관과 연해주 장관에게 이의 단속을 요구했고, 오후 7시, 러시아 관헌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금지하고 학생 2명을 구인하는 등 신한촌의 태극기는 모두 끌어 내리게 했다. 이튿날 조선인 노동자들이 모두 파업을 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였다. 스파스크에서는 3월 18일 약 5백 명의 한인들이 모여 선언서를 배부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군은 러시아 관헌을 원조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조선인 여러 명이 이 과정에서 부상했다.
31운동은 미주 여러 지역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촉발시켰다.
3·1운동 직후 국내외 각지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내에서만 한성(漢城)·기호(畿湖)·평안도에서 임시정부가 결성되었고, 러시아령과 상해에서도 각각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가장 이른 것은 1919년 3월 17일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결성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였다.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각 지방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가 임시의정원으로 개편되고,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러시아령과 서울, 상해에서 각각 망명정부가 수립되다 보니 통합이 시급해졌다. 그래서 상해 임정 측은 상해 정부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인정하는 방안을 가지고 내무차장 현순과 김성겸을 러시아령에 파견해서 국민회의 관계자들과 협의했다.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총회를 열어 해산을 선언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정은 그해 8월말 대통령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9월 15일에는 한성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노령의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3개 임정(상해, 노령, 한성)의 통합정부 출범을 선언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서 위상을 강화할 수 있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은 이렇게 대한민국 원년이 되었다.
상해 임정이 한성정부 노령정부를 통합하는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아준 2만5,000달러를 가지고 상해로 건너간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이처럼 삼일운동은 그 시작부터 삼일운동의 성과로서 만들어진 상해 임시정부까지 재외동포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가 삼일운동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대한의 독립을 위해 전 세계 조선민족이 단합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펼쳤듯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전 세계 재외동포가 일치단결하여 남북의 동포들과 함께 한반도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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