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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1885~1918)

김알렉산드라는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처에서 함경북도 출신 김두서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 철도 건설현장 통역관을 지낸 아버지한테서 물림을 받은 김알렉산드라는 여러 나라 말에 능통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10살 때 아버지마저 여의고 아버지 친구인 폴란드인 스탄케비치에게 맡겨졌다.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일하던 김알렉산드라는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

1914년 이혼한 김알렉산드라는 우랄산맥 벌목장 통역으로 일하게 된다. 한·중·러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받아주기도 하며 신망을 얻었고, 1917년 초 러시아사회민주당에 들어갔다. 그 해 7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김알렉산드라는 중국과 한국 출신 노동자, 1차대전 전쟁포로 등을 상대로 혁명을 선전하는 일을 전개한다. 이듬해에는 하바로프스크 시당 서기와 회계, 극동소비에트 외무위원직을 맡는다.

첫 한인 러시아사회민주당원(볼셰비키)인 김알렉산드라가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결성 때부터다. 1918. 5월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 중 이동휘, 박애, 김립, 유동열 등은 “러시아 노동계급과의 밀접한 연계에 의해서만, 압박받는 한국의 승리가 가능하다”며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알렉산드라는 중앙위원으로 핵심 역할을 한다. 이들은 당조직 뿐 아니라 한인 사관학교를 만들고 한국인 100여명으로 적위대를 조직했다. 이 무렵 김알렉산드라는 블라디보스토크 주둔 일본군들에게 뿌린 전단에서 “총부리를 착취자들에게 돌려라. 일본 자본가들과 사무라이 장군들에게”라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에 찬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해주에 상륙한 일본군 등 외국간섭군의 지원에 힘입은 백군이 한인 적위대를 포함한 혁명세력과의 시가전 끝에 하바로프스크를 탈환했기 때문이다. 1918. 9월10일 마지막까지 남았던 소비에트 간부들은 기선에 올라 아무르강 상류를 향해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백군 포함에 나포된다. 김알렉산드라를 주시해오던 일제는 자국민임을 주장하며 백군에게 그의 체포를 요구했다고 한다. 김알렉산드라는 심문에서 러시아혁명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조선 인민은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할 때에만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인사회당 중앙위원을 지낸 이인섭은 그가 조선의 13개 도를 상징하는 열세발자국을 걸은 뒤 총탄을 맞았고, 그 뒤 하바로프스크 시민들은 오랫동안 아무르강에서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