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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외동포열전4- 이동휘

(李東輝, 1873.8.2 ~ 1935.1.31)

 호 성재(誠齋).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출생하였다. 이동휘 선생의 아버지 이승교는 연해주 대한인노인단의 대표로 3.1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등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선생이 부친의 정신을 이어받아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집안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1895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신식무관교육을 받고 강화진위대장으로 근무하였다. 1907년 일제의 구한국군 군대 강제해산에 분개하여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는데 그 방편으로 기독교를 수용하고 특히 구국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를 세우고 국학 및 근대학문과 군사교육을 병행하여 구국인재양성의 요람으로 활성화시켰다. 또한 1908년에는 서복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이동녕,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투옥되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11년 가족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간민회를 조직하고, 1913년에는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권업회에 참여하는 등 한인의 자치와 결속을 도모하고 국내에서 전개하던 애국계몽운동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아울러 망명이전부터 독립방법론으로서 실력양성론의 한계를 인식한 선생은 무장투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 건립을 추진하고 독립군을 육성하기 위해 대전사관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총장, 1920년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때 공산당으로 전향, 이승만(李承晩)·안창호 등과 대립하고, 소련에서 독립운동자금으로 받은 100만 루블 가운데 40만 루블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조직기금으로 사용한 것이 드러나 사퇴하였다. 시베리아에서 병사하였으며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