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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아평화연대, 『독도 평화의 섬』선포식 성황리에 마쳐 -
     ◎ 대한요트협회와 함께 『제8회 코리아컵 요트대회』후원
     ◎ 김경천 장군 외증손녀 김올가 및 작년 고려인랠리팀 등
     ◎ 시민참가단 등 70명 확정, 독도에서 각종 퍼포먼스

□ 독도가 ‘평화의 섬’으로 전 세계에 선포됐다.

지난 5월17일 오전 10시 30분 독도 현지에서 2015 제8회 코리아컵 국제요트대회 참가임원 선수단, 울릉·독도주민, 외국인, 재외동포 등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독도가 평화의 섬으로 선포됐다.

참석자들을 대표해 시카고에 거주하는 재미동포 림관헌 평화문제연구소 해외담당 부이사장이 ‘평화의 섬 독도에서 전 세계의 평화를 말하라’는 제목의 ‘독도 평화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독도가 평화의 섬’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날 행사는 동북아평화연대(이사장 도재영, 이하 동평)와 코리아컵 조직위원회(조직위원장 심민보) 공동 주최·주관, 대한요트협회(회장 박순호), 울릉군(군수 최수일), 울진군(군수 임광원), 국민은행(은행장 윤종규), 신한카드(사장 위성호)가 후원하는 행사로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에서 세계 각국의 재외동포와 함께 세계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는 어울림 한마당 행사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 참석자들은 ‘독도 평화선언문’을 통해 “평화의 섬 독도로부터 전 세계에 평화가 널리널리 퍼져나가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만들기에 동참할 것을 전 세계를 향해 촉구”하고, “남북간에 화해와 통일의 길이 열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이날 평화의 섬 선포식 본 행사는 동평의 김종헌 사무국장의 사회로 정무호 울릉군 부군수의 환영사, 코리아컵 심민보 조직위원장의 대회사, 동북아 평화연대 도재영 이사장의 축사에 이어 임관헌 부이사장의 독도 평화선언문 낭독, 정 부군수의 도 이사장, 림 부이사장, 심 조직위원장에 대한  독도 명예시민증 발급, 김성도 독도리장에게의 선물증정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본 행사 앞뒤로 이화여대 국악과 학생들의 주제공연 ‘독도에 부는 바람’, 쟁이다인 한국무용팀의 두드림 대북공연, 한국무용 등 이색적인 축하공연도 함께 진행됐다.

이날 행사 참석자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피스 마크를 다함께 만드는 퍼포먼스를 끝으로 섬을 떠났다.

이날 행사에는 김성도 독도리장, 울릉지역 초청인사, 고려인인 동포, 중국동포, 재미동포, 새터민 청소년, 일본인 평화운동가, 원로 평화운동가, 시민탐방단 코리아컵 자원봉사자, 사무국 초청 참관단 등이 참가했다.

□ 독도를 평화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마음을 담은 행사였다.

동북아평화연대 김종헌 사무국장은 이번 독도에서 평화의 섬을 선포한 의미에 대해 “독도는 당연한 우리의 영토이지만 그것만 주장하고 일본에 대한 공격만 해서는 세계인에게 울림을 주기 어렵다”면서 “세계의 평화적인 시민들이 침략과 전쟁이 되풀이 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독도를 평화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이번 행사를 기획하였다”고 밝혔다.

아울러 국내외 고려인, 중국동포 등 동북아동포들은 일제에 침략에 의해 해외로 이주한 역사 역시 침략과 전쟁의 역사 때문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이번에 이번에 20여명을 초청하여 동북아평화연대 임원과 회원, 요트협회관계자, 울릉도 주민 등과 함께 평화선언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 KBS 『남북의 창』에서 동행취재 - 5.23(토) 07:50~08:30 방영

아울러 이번 행사에는 KBS 남북의 창에서 동행취재하며 참가자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 등을 다각적으로 취재하였다.
이번 행사에 관해서는 오는 토요일 5.23. 07:50~08:00에 방영될 예정이다.

<붙임자료1>

사진1. ‘독도 평화의 섬 선포식’ 식장에 선 주요 참가자들. 왼쪽부터 일본의 평화운동가 오카다 다카시(岡田 卓己), 한사람 건너 동북아평화연대 도재영 이사장, 정무호 울릉군 부군수, 심민보 코리아컵 조직위원장, 송영배 서울대 명예교수, 이창복 민주인사, 임관헌 평화문제연구소 해외담당 부이사장.



사진2. 참석자들을 대표해 ‘독도 평화선언문’을 낭독하는 평화문제연구소 부이사장.



사진3. ‘독도 평화의 섬 선포식’ 참가자들은 이날 행사의 클라이맥스로 평화를 상징하는 인간 피스마크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했다. 인간 피스마크를 만드는 참가자들.



사진4. 하늘에서 본 인간 피스 마크.



<참고> 피스마크


<참고> 동북아평화연대 기념 손수건에 표시된 평화표시



<붙임자료2>

‘독도 평화선언문’  전문

 

평화의 섬 독도에서 전세계의 평화를 말하라!

  금년 2015년은 우리나라에게는 광복70주년 되는 해입니다.
  또한 전세계를 폐허로 만들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되는 해이며,  냉전의 산물이었던 한반도의 남북간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생한 지 65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전쟁기간 중에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극심한 고통을 겪었음을 역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는 아직도 분쟁과 인권유린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특히 동북아 지역도 각국간의 치열한 경쟁속에 불안함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독도는 아름다운 자연생태가 유지되고 있는 생명들의 낙원으로서 평화를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이 평화로운 섬에 가해국, 피해국, 남북한 출신의 다양한 평화시민들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 평화의 섬 독도로부터 전세계에 평화가 널리 널리 퍼져 나가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 만들기에 동참할 것을 전세계를 향하여 촉구하는 바입니다.
  오늘을 계기로 동북아 국가와 우리 평화시민 모두는 상호간에 우애와 협력이 싹트고, 남북간에는 화해와 통일의 길이 열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우리 모두 다함께 평화를 외쳐봅시다.

독도에게 평화를! (Peace) 한반도에 평화를! (Peace)
동북아에 평화를! (Peace) 전세계에 평화를! (Peace)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Peace)
평화! 미르(мир)! 허핑(和平)! 헤이와(平和)! 피스(PEACE)!

2015년 5월 17일

광복 70주년 독도 평화의 섬에서 - 평화선언 참석 동북아 평화시민 일동

울릉군수/박미하일/이태준/오카다 다카하시/임관헌


<붙임자료3>

평화시민증 수여 장면 - 동북아평화연대(이사장 도재영)는 독도에서 행사를 치른 후 5월 17일 별도로 참여자 모두에게 평화시민증을 수여하는 행사를 가졌다.


김 안드레이(고려인,영화감독, 랠리참가자)



마틴(독일인, 사진작가, 부인이 고려인)



김올가(고려인, 전남대 박사과정, 김경천 장군 외손녀)



토크콘서트 후에 -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길


□ 상세한 내용은 동평으로 문의하거나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문의처 :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
                Tel) 1688-7050    Fax) 02-719-5933
                E-mail) peaceasia@daum.net
                Home Page) www.peaceasia.or.kr


<참고>

1) 코리아컵 요트대회 및 국민참가단 코스



2) 김 올가 씨 - 김경천(金擎天) 장군 외증손녀

한국어 연구하러온 카자흐스탄 동포 김올가씨
무장투쟁 김경천 장군 외증손녀
‘우리말 경어법’ 석사 및 “전남대서 민족이주사 박사” 과정중

 
“한국어 통·번역사들이 한국어 경어법을 오해해 엉뚱하게 옮기는 일이 잦아요. 그래서 논문 주제를 경어법으로 잡았어요.”

일제강점기 시베리아에서 활약한 ‘항일 영웅’ 김경천(1888~1942)의 외증손녀인 김올가(38·사진)씨는 카자흐스탄국립대 대학원(한국어통번역과)에서 한국어 경어법 관련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 자료 수집을 위해 한국을 찾았 왔고, 광주에서 전남대 교수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 현재는 대학원 디아스포라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민족이주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외증조부 등 가족사가 민조이주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나에게 적하한 연구 주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제2의 도시인 까라간다시에서 살았던 김씨에게 한국어는 외국어였다. 한국말을 사용하면 주변의 따가운 질시를 받았던 시절도 있어 신문기자였던 아버지는 한국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면서 한국어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96년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봉사단 단원한테 한달 동안 한글을 배운 그는 97년 알마티 국립대 한국어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알마티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영남대를 방문할 기회도 얻었다.
김씨는 “그때 비행기 안에서 한국땅을 처음 보며 할머니가 저한테 해주신 말씀이 떠올라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그의 할머니는 김경천 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장군 할아버지처럼 바르게 살아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상 한국일보 보도내용 요약>

김경천(金擎天) 장군 (1888~1942?)

   연해주 지역 항일독립운동가
   함경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장군의 본명은 김현충, 김광서이며, 후에 지청천 등과 함께 별명으로 ‘하늘 천(天)’자를 넣어 김경천을 사용하게 되었다.
  김장군의 아버지 김정우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인사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11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도쿄에서 기병장교로 근무하다가 1919년 기미 독립선언 직후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창해청년단 총사령관으로 시베리아 일대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1921년에는 수청의병대의 지도가가 되었고 러시아 혁명세력과 연합하여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고 김경천이 사령관을 맡았으며, 그해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어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1922년 블라디보스톡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하다가 1937년 스탈린 정권하에서 강제이주 정책에 반발하였다고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1939까지 두차례 복역했다. 두 번째 복역 중에 유배된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시베리아 일대에서 유명해진 그는, 흰 말을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어 별칭으로 “조선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웠으며, 특히 1920년부터  1925년까지 틈틈이 일기를 써왔는데 그것이 바로 이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다. 특히  1888년 그가 태어난 때부터 1919년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한 시점까지는 회고록 형식으로, 그 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일기형식으로 각종 사건과 체험들이 기록되어 있다.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3) 이태준 - 이계엽 (李啓燁) 열사 후손

이계엽 (李啓燁) 열사(1919~1947)

  교과서에서 배운 ‘유관순 열사와 아우내 3.1운동’, 그리고 경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창녕) 영산 3.1운동’은 우리 국민이나 경남사람이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자랑스러운 만세운동이다. 하지만, 유관순의 아우내장터 3.1운동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면에서도 3~4배가 크고 격렬했던, 그리고 영산 3.1운동보다는 20배가 큰 ‘삼가장터 3.1운동’은 무슨 이유로 그동안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우리들의 기억 속에 사라져 버렸을까?

  3.1운동 후인 1919년 6월 일제(日帝) 조선헌병사령부에서 작성한 ‘조선소요사건상황’과 1936년 12월 경남경찰부에서 작성한 ‘고등경찰관계적록’, 그리고 1921년 9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안창호?이광수가 간행한 ‘한일관계사료’ 등 당시의 기록물과, 1967년 재일사학자인 강덕상 교수가 엮은(편저) ‘현대사자료’ 등 객관적인 사료(史料)에 의하면,

  삼가장날인 3월 18일, 3월 23일 양일간에 일어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때, 특히, 2차 만세의거일인 3월 23일(음 2월 22일, 삼가장날) 삼가장터 만세운동 때, 3만 여명이 참여하여, 공재규 등 42명 순국, 100 여명 중상, 이계엽(4년형) 등 38명 체포로 나와 있다. (하지만, 현재 국가로부터 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겨우 13명 뿐이다)

  4월 1일 일어난 아우내 3.1운동 때에는, 3천여 명이 참여, 유중권(유관순 父) 등 18명 순국, 43명 부상, 조인원(조병옥 박사의 父, 3년형), 유관순(18세, 이화학당 학생, 3년형), 조병호(조병옥 동생, 2년6월형) 등 11명이 체포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3월 13일 일어난 영산 3.1운동은 500~1천여 명이 참여하여, 구중회(제헌국회의원, 10개월형) 등 25명이 체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참여자 숫자, 일어난 시기(날짜), 순국자, 부상자, 체포자 등을 보면, 삼가장터 3.1운동이 얼마나 격렬하고 위대한 독립만세운동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료는 가해자인 일제가 (축소) 작성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당시 임시정부 등에서 작성한 것을 토대로 한 것으로, 객관성이 있다 하겠다. 또한 1919년 당시 일제가 기록한 상황일지에도, “삼가 시위는 가장 악성이다”고 나와 있다.

  특히, 옥고를 치른 분을 보면, 삼가장터 3.1운동의 이계엽(李啓燁, 1919~1947,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2004. 4. 27일 만주 흥룡강성에서 유해를 송환하여 대전국립현충원에 봉안) 열사가 4년형을 받았는데, 아우내 3.1운동의 유관순(柳寬順, 1902~1920,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열사는 3년형을 언도 받았고, 구중회(具中會, 1898~납북,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열사는 10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계엽 열사는 3.1운동 때 "기미(己未) 삼일운동(三一運動) 栢山面(백산면, 現 쌍백면 하신?백여?삼리 일대) 代表者(대표자) 李啓燁(이계엽)"이라고 쓴 장폭기(長幅旗, 큰 깃발)를 들고 시위에 앞장섰고, 전봇대 파손 등 핵심적인 역할을 하다 4년형을 언도 받았고, 그 후 일제의 폭정을 피해 쌍백면 하신리 고향을 등지고 가족과 함께 만주 흥룡강성으로 이주하여,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1947년 만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2003년 만주에서 영구 귀국한 손자(이충길)는 가난을 대물림한 채 2008년 별세했는데, 아픈 우리 독립투쟁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특히, 합천군 쌍백면의 하신리 및 운곡리는 인천李氏 집성촌으로, 한 지역, 한 문중이 모두 독립만세운동을 한 흔치 않은 곳이다. 옥고를 치르고,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증빙자료 부족으로 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이계엽 한 분 뿐이다. 참으로 애석하다. 그리고 면목이 없다.    
  
(경남일보 2009. 3. 5)                                                                 /경남도의회 특별 전문위원 조찬용




4) 박 미하일, 소설가, 화가

1949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1970년 타지키스탄 두샨베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로 처음 1976년에 문단에 등장했다. 러시아작가동맹위원. 러시아예술가동맹 위원.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6편, 중편 소설 7편, 20여 편의 단편소설과 2편의 무대연극 있다.
단편소설 3편은 독일(1996년), 시작품 4편은 캐나다(2003년)에서 출판. 한국어로 번역돼 서울에서 나온 소설작품으로는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1995년)와 “발가벗은 사진작가”(2007년, 러시아어 제목: “사과 정물화”) 2편 있다.
문학상 수상: 1) 발렌찐 까따예프 문학상(2001, 2007년); 2) 한국 펜클럽 및 재외동포재단 문학상(2001년); 3) KBS 예술 문학상(2006년); 4) 쿠프린 문학상(2010년).
개인 미술전시회는 모스크바, 서울, 파리, 알마티 등에서 열렸다.
 
한국어로 번역: 이문열 장편 소설”사람의 아들” (2005), 윤후명 장편소설”둔황의 사랑” (201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