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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누비며 평화를 찾는 사람들


4월 9일 “골목이 평화다” 개화기 정동일대 답사기


지난 4월9일 토요일 서울시청앞에 노란수건을 맨 사람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주변에서 경찰들이 나타나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참 별걸 다...
동평의 2016 “골목이 평화다” 첫 행사가 여러사람들의 호응속에 마무리되었다. 행사의 내용은 『개화기 정동일대 답사 – 변월룡화가 전시 감상』 동평은 우리 근대사와 현재의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동북아역사 속의 골목유산을 찾아보고, 또 앞으로는 동북아시아에 산재하고 있는 각종 골목유산을 발굴하고 연결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본 행사를 기획하였다.





정동(貞洞)은 태조 이성계가 계비 신덕왕후 능을 이곳에 안장하면서 생긴 이름 정릉(정릉동)이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환궁하려 하였으나 궁궐이 모두 훼손되어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행궁으로 하여 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렀다. 이번 행사는 이 덕수궁을 중심으로 개화기 이후 형성된 정동의 현재, 근대의 흔적을 찾았다.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흔적들도 있고 사라져가는 것도 있다.

4월 9일 오후 2시 시청에서 출발




4월9일 서울 시청 앞에 ‘골목이 평화다’ 행사에 약 34명이 모였다. ‘동평’의 회원들, ‘문화유산연대’의 회원들, 또한 언론보도,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서 소식을 접한 분들이었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성공회성당이었다. 성공회성당은 우리 국민에게는 독재의 사슬을 끊던 1987년 6.10 국민대회를 시작하던 민주화의 근원지로 더 인상깊은 곳이기도 하다.


“덕수궁 돌담길 언능 돌리도! 영국대사 찰스 헤이님!”






바로 옆에 있는 영국대사관 정문은 덕수궁 돌담과 붙어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인인 우리는 덕수궁의 돌담길을 끝까지 돌을 수도 없었고, 예쁜 포즈를 지으며 사진 찍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며 퍼포먼스를 했다.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전




덕수궁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봄꽃들의 향연이다. 꽃잎이 흩날리는 분수대와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쪽에는 변월룡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자란 고려인 화가 변월룡. 그는 북한의 모습을 작품으로 많이 남기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듯 보였다. 그의 인물화와 풍경화를 보면 그 시대를 생동감 있게 느낄 정도로 사실적이다. 인물화를 그린 그림을 볼 때면 사람들에 대한 그의 연민을, 풍경화를 그린 그림을 볼 때면 자연에 대한 그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그의 그림을 엿보기로 한다. 고려인의 모습과 1953년경 평양의 모습..








을사늑약의 강제된 장소 –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덕수궁을 나와 덕수궁 중명전으로 향했다. 이곳은 원래 덕수궁의 부분이나 당시 미국영사관에 막혀 별도의 건물이 되었다. 고종이 아관파천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를 때 명하여 지은 건물이며,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들어가 볼 순 없지만 이 건물은 지하실이 복잡하여 미로처럼 얽혀있다고 한다. 아마 고종이 위험을 느껴 대피소로 마련한 게 아닐까? 여전한 미스테리를 안겨준다.
이 건물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곳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엔 을사녹약이 무효임을 증명하는 서류들과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알리고자 하는 많은 자료들이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00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가면 벽면 한쪽에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지금의 태극기와 다른 것이라곤 미묘한 차이의 색과, 가운데 문양뿐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약 100년 동안 태극기는 변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각종 올림픽 등 스포츠 경기, 국제회의 등에서 우리의 자주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언덕에 올라서다

중명전을 나와 다시 우측으로 돌면 러시아공사관 터가 나온다. 거기에는 옛 탑만 외로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또한가지 미스터리를 접하게 된다. 바로 지하에 비밀통로가 있다는 설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관파천(1896년) 당시 러시아 수군의 막사를 지었는데 1981년 발굴조사에서 비밀통로가 발견되었으나, 덕수궁까지 연결된 것은 아니고 20m에 불과하다.


서울성곽 교남구간을 따라 걸으며...





새문안로 골목을 어찌할 것인가? 이 동네는 돈의문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을 하면서 이 지역의 구도심지역을 재생사업을 하기로 결정된 곳이다. 다행히 한옥, 근현대주택 및 골목길 보존을 통해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고, 동네 박물관, 상업시설 등 문화사업 복합형태의 역사문화 마을을 조성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나날이 사라져 가는 사람냄새 나는 골목이 아쉬운 이 때 조금은 위로가 되는 소리다.

그리고 우리는 서울교육청 옆으로 성곽을 따라 가다보면 홍난파 가옥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고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유학 도중 귀국하기도 한 그... 봉선화를 비롯한 주옥같은 수많은 곡들,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고향생각, 오빠생각.... 그러나 말년의 친일행각으로 그의 음악과 천재성이 훼손되기는 하였지만...우리는 여전히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아직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까? - 행촌동 딜쿠샤(Dilkusha)

홍난파가옥을 지나 딜쿠샤로 향했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미스테리의 건물이었다. 건물의 돌판에 새겨진 “DILKUSHA 1923”






이 건물을 주인은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 1975~1948)의 가옥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3.1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최초의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여 알리기도 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해 추방되던 1942년까지 살던 곳이다. 그는 1948년 미국에서 사망하여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서울시는 1995년부터 딜쿠샤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건물 기초에 새겨진 ‘딜쿠샤 1923(DILKUSHA 1923)의 뜻과 건물의 역사가 확실치 않아 헤메던 중, 2006년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가 한국을 방문하며 밝혀졌다.





마침내 그동안 ‘귀신 나오는 집’으로 오명을 쓴 채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을 품어온 종로구행촌동 1-88번지의 비밀은 머릿돌에 새겨진 딜쿠샤라는 이름과 함께 부부의 드라마틱한 사연이 되살아났다. 이내용은 2006년 2월 28일 KBS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나라>(장상일 감독)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바 있다. 내용도 모르고 빈집으로 있던 이곳을점거하여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아직도 14가구가 그 집에서 살고 있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먹었을까?”

서울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100년 넘은 동네, 이 동네는 소설가 박완서가 자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박완서는 황해도 개풍에서 태어나 학구열이 높은 엄마의 치맛바람에 이동네로 유학왔다. 소녀는 고된 셋방살이를 하며 서울의 복닥복닥한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그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옥바라지 골목 – 백년사가 사라진다!

어느덧 막바지 우리는 옥바라지 여관골목을 향해 가고 있다. 사방에 철거가 시작되어 막혀있는 길 투성이다. 김구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 김구 선생의 어머니는 이 옥바라지 골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사식을 넣어주던 곳, 유관순, 여운형 독립운동가가 갇혔던 곳, 1975년 4월 9일(마침 그날이다)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사형이 집행되며 사법살인이 이뤄졌던 곳, 우리 질곡의 현대사 100년이 고스란이 남아있는 이곳이 이제 아파트 몇 채와 바꿔질 모양이다. 오호~~통재라!




우리는 마지막 퍼포먼스로 우리의 바람을 나타내었다. “옥바라지 골목보존하여 도시재생 실시하라”




<끝>